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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화롯불을 지피려

iem888 2008. 3. 6. 23:04

                    화롯불을 지피려
                                    
     
   화롯불 안에서 타닥거리며 불꽃이 튄다. 가마니에 담겨야할 벼 알갱이들이 어쩌다 화로에 쫓겨왔을까. 벼 알갱이가 발악 끝에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며 퉁겨져 나가는 쌀 강냉이처럼 나도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다. 둘러봐도 내겐 아무 것도 없는 듯 허무하다. 괜스레 심술이 나기도 한다. 새삼스레 어줍잖은 나이 듦을 탓하고 싶었는지, 스산한 모래톱에 선 듯 외롭고 세상살이가 턱없이 고단하게 여겨졌다. 제 풀에 다 자란 듯한 아이들은 엄마의 사추기(思秋期)라고 놀렸다.


  우연히 책갈피에서 시 한편이 다가왔다. 황동규 시인의 '탁족'이다. 어느 날 문득,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면 그 어디나 살갑다'고 했다. 문명에 지친 시인이 휴대폰도 카드도 없이 떠난 여행에서 쏟아낸 독백이었다. 지쳐있던 내 일상을 풀어 주는 시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져있던 내 어깨가 추슬러졌다. 시냇물에 담긴 시인의 맨발이 내 발처럼 시원했다.  스무 살 언저리 이전부터 문학이란 한 구절만 들어도 귀가 쫑긋했다.

 

결혼 전에 도시에서 들락거리던 정서가 결혼으로 시골에 와서 겪게되던 다른 문화에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다. 말 한마디 제대로 통할 수 없어 외로웠지만 속내를 털어 내 보일 만한 이웃도 없었다. 그때, 문학이란 가슴에 숨겨 다니던 불씨였다. 세월 귀퉁이를 돌아들 때마다 쌓여가던 노트, 내 안에 흐르는 눈물을 가만가만 뒤적여 주는 화롯불 같은 위안이었다.


  꺼진 줄 알았던 작은 불씨 하나가 그때까지 내 가슴속에서 쉼 없이 타고 있을 줄이야. 내 팽개쳐져 비실비실 스러졌던 문학의 불씨들이 스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문학이라는 화롯불을 향해 날아들던 잿불의 불씨였다. 사위여가는 화롯불을 보면 겉으로는 하얀 재만 남았다. 그러나 하얀 잿불 속에서도 발간 속 불은 가물거리고 있다. 그런 불씨 한 올이 내 안에 꺼지지 않았던 것이다. 젊은 날,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늘 껄끄럽게 매달리던 향학열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게 했다. 오래 읽히지 않던 그 책들이 꺼져버린 화롯불의 재 같은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채 서가에 숨죽여 있다. 시름시름 시들어가고 있던 책들을 꺼냈다.


  꺼질 듯 가물거리던 불씨에 시 한편이 촉매제가 되어 심지를 돋은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이것저것 책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저마다의 내면을 토해내는 시집을 찾았다. 삶이 진득하게 녹아 들어간 수필도 고르고 베스트 셀러라는 이름표를 매달고 날라 다니는 소설책도 골랐다. 주문한 책들이 오기까지 시집간 딸의 소식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책을 기다렸다.
  제법이나 들고 있는 나이를 잠시 잊은 채, 나도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차마 엎어버리지 못 한 채 가두던 화롯불의 작은 불씨를 키워보고 싶었다. 따듯한 온기를 제대로 전해줄 수 있는 화롯불이 되고 싶어서 용기를 냈다. 문학의 기초 이론부터 다져보기로 했다. 문학 창작교실 문을 두드려서 선생님들을 찾았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세상이 달리 보였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쳤던 모든 사물들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섰다. 비 그친 뒤 맑게 개어 먼 산자락에 걸쳐지는 구름 그림자도 보였다. 아침 뜰에 내려서면 풀잎에 구르는 빗방울도 경이롭게 보였다. 지하철 바닥을 기어다니는 장애인의 땟국 절은 손바닥에 얹힌 동전 한 닢도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문학이라는 커다란 눈이 가늘게 실눈으로 보이던 삶을 샅샅이 되짚어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문학이란 자아를 크고 깊게 성장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삶을 탐색하고 관조하고 통찰하라. 진지하고 성실한 인생의 흔적을 드러내는 글이 좋은 글' 이라고도 한다.


  문학에 대한 열정은 조갈증이 되어 나를 늘 달뜨게 한다. 문학 수업을 받는 것은 조갈증을 풀어내려는 길이다. 선생님들의 가르침은 갯솜이 되어 내 조갈증을 야금야금 풀어내 주었다. 내게는 아직 조급함이 앞서있다. 익지 않은 과일을 따먹으며 단맛이 없다고 투정하는 풋내기 과수원지기의 조급함이다. 분출을 꿈꾸는 용암이 되어 가슴 밑바닥에 꿈틀거리는 많은 언어들을 품기만 했다. 그 용암을 세상으로 끌어내지 못하는 버거움에 고민하고 좌절한다. 가슴에 차 오르는 감격을 문장으로 끌어올려 주지 못하는 용렬함 때문이다. 아직 진지하게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갖추지 못한 탓이리라. 


  '친한 친구가 보낸 편지'같은 글들을 쓰고 싶다. 내 안에 화롯불 하나 피우려고 부지런히 불쏘시개를 찾는다. 세상 이곳저곳에 널려진 불쏘시개를 잘 선택해야겠다. 진솔하게 삶을 다스려 가면 내 화로에도 따듯하게 불 피워낼 수 있으리라.

           2007 . 문파 문학

출처 : ♧ 수필 친구 ♧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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