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좀 다른 그런코디
♦ 베일과 노출의상 ♦
iem888
2006. 8. 26. 08:22
♦ 베일과 노출의상 ♦:
베일이라면 무엇인가 알 듯 하면서 모를 듯하지만 알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어찌 생각하면 답답해서 벗겨 버리고 푼 호기심. 비밀이 숨겨진 숙제 같은 우리의 감성을 묘하게 만드는 참으로 신비스럽기만 한 것. 왜 우리들의 마음을 매료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숨겨 져있다. 아마도 조물주가 우리 감정에 몰래 넣어준 선물로 받아 드릴 수밖에 없다. 옷과 베일과의 관계는 특히 여성미의 베일효과는 유사 이래로 영원한 미지의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옷을 걸친다고 한다. 아주옛날에 우리의 지혜와 기술이 미약했던 언제부터인가 반사적 본능의 발상으로 신체를 가리기 위해 무엇인가 걸쳤을 것이다. 나뭇잎이나 동물의 표피로 아니면 반사적으로 손이나 자세 변경으로 그리고 그 표정의 눈망울로 사랑이 싹텄을 것이고 베일의 호기심과 미모에 이성을 느낀 그들은 한 쌍을 이루고 이어져 내려오는 세월이 지금의 우리들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 혼과 맥이 지금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선물이겠거늘 우리는 아름다움과 행복한 마음으로 긍정적 사랑으로 받아들여 옷에 대한 베일효과를 연구해야 된다. 우선 베일은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거의 불투명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빤히 보이는 투명 형이다. 그 어느 쪽이든 보이든 안보이든 내 몸을 가린다는 개념이다. 불투명하다고 감추어진 실상을 모를 이 없건만 수단이 갸륵해서 느낌이 다르다. 투명 형은 훤히 보이지만 이 또한 시각적 느낌을 착각으로 유도한다. 투명한 면사포로 신부 얼굴의 그 모습이 곱고 황홀하다. 투명스타킹의 각선미가 곱고 쭉 빠졌다. 노출된 실상보다 베일을 통한 그 모습이 더 아름다움의 베일효과다. 불투명에 감추어진 비밀이 궁금하다. 완전 밀폐된 이슬람 여인들의 부루카(복면)나 차도루 또한 베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는 너무 심한복면이다. 아무리 종교의식의 율법이라 하드라도 이는 학대며 어떤 의미로도 여성미의 해석이 되지 않는다. 야만인에 불과하며 이는 극단적인 남성 우월의 카리스마적 횡포이다. 다행이도 테러국가에서 해방되어 베일을 벗게 되었다니 좋은 일이다. 적어도 얼굴만이라도 아니 눈만이라도 노출이 허락되었다면 환경차원에서 세찬바람과 먼지로부터 피해를 막는 필수요건일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마음 역시 미적가치가 있다는 상상을 해 본다. 베일의 틈새로 엿 보이는 여인들의 눈빛에서 시름을 읽을 수 가있다. 삼차원적 입장에서 그들의 미를 상상으로 어루만져 본다. 무엇인가 내 가슴에 와 닿는 듯한 감정이 묘하다. 미적 상상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어내려는 염치없는 내 상상은 모두를 송두리째 받치고 싶다. 하지만 무엇인가 아름다움이 있다고 갈등하지만 풀만한 해석이 도대체 나오지가 않는다. 아니다 주고 싶은 내 마음이 갸륵한 것이다. 그들로부터 내 마음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미적상상은 묘한 심리의 상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옷은 우리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신의 선물로 보면 옷은 대인관계이며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공감하는 아름다움으로 읽어 냈으니 얼마나 고귀한 미를 발견한 것인가. 베일로부터 미적 가치를 영화 친구 로부터 교복을 재현하듯이 테러의 관심이 베일로 이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부루 카를 벗고 미소 짓는 아프칸 여인과 눈만 반짝이는 차도루를 내린 고운얼굴의 전부를 상상해본다. 이렇듯 베일로부터 느껴지는 미적상상은 묘한 심리의 상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옷은 우리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신의 선물로 보면 옷은 대인관계이며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공감하는 대세론이 중요하다. 따라서 불투명하고 철판 같은 베일에서도 고귀한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려 했던 나는 철판 같은 베일 속에서 새로운 느낌을 찾아 낼 수 있는 대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개발로 이어지고 나의 만족감이 문을 열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자극을 주고 호응을 받는 성공작품이 될 것이다. 베일의 틈에서 내가 무엇인가 발견했다면 실체 보다는 상상으로 느끼는 부분이 더욱 중요하며 이를 현실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에 따른 수단과 방법으로 구체적인 표상을 만들어 남들에게 내 뜻을 전하게 되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가 문제다. 옷은 입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변수가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모방하는 실상은 사실적이어서 한계에 그치고 이를 새롭게 또 자극적으로 부연해서 이미지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상보로 덮여져있는 밥상을 배고파 절실할 때와 입맛이 없을 때에 열어보는 순간적 심리상의 기대감이 다르며 부산에서 바라보이는 오륙 도의 과학적 수의 정확성과 느낌으로 보는 계산의 수가 다를 것이다. 아기 입에 물린 노출된 엄마의 가슴과 반라의 관능미로 노출된 여인의 가슴에서 느끼는 미의 차원이 다르다. 이는 고귀하고 심오한 미와 이성을 느끼는 차원으로 해석해본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성을 느끼는 베일효과에만 집중하고 있다. 우리조선조 시대의 장옷이나 이슬람 여인들의 베일도 이성을 느끼려는 수단과 목적은 아니었으리라. 다만 질서의 수단으로 남성우위시대의 산물로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성을 독점의식으로 일종의 억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보이고 싶은 충동적 여심은 폐미니쥼 으로 이어 지면서 현대를 맞이했고 지금은 자유패션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갈등은 존재하며 도덕적 양심상의 질서에 맡길 뿐이다. 따라서 옷과 베일의 미적가치는 영원한 여성미로 간직될 것이다. 자유를 만끽하는 패션은 극히 반항적이어서 유니섹스로 표현되었고 질서의식 또한 희박해 감을 느낀다.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또는 거리에서 도처에 만연한 노출패션은 이미 면역단계를 오르고 있다. 베일과 노출은 극과 극을 허용할 수는 없다. 자연 도태될 것이다. 테러전쟁에서 패한 이슬람 여인들의 복면을 벗겼고 과다노출의 면역이 여인에 옷을 입힐 것이다. 이렇듯 오묘한 베일과 노출은 우리들 상상 속에서 아니면 본능적 심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우리의 본질(DNA)이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구상하는 베일과 노출에 대한 느낌은 환상적이고 황홀감을 느끼게 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고 그 조화를 에로틱하고 에로적 자극이나
동정의 미로 까지 이끌어 낸다.
무대의 막이 오르는 순간의 호기심 그리고 기대감도 베일의 효과로 볼 수 있고 연출자들의 옷으로부터 베일이나 노출을 이용한 그 효과는
매우 크다. 이제 우리는 자유패션시대를 살면서 모두에게 즐겁고 윤택한 생활을 위해서 노력할 시대라고 본 다. 글/멋짱 (iem888) |